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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버스(Shortbus, 2006) ☆☆☆


[숏버스]를 처음 접할 때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순간이었습니다. 로저 이버트의 2006년 깐느 영화제 기사를 시작으로 섹스를 관객들에게 들이 대민다는 것에 대해 들어왔기 때문에 처음엔 그리 많이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상 때문에 별 걱정 없이 기숙사에서 늦게 먹게 된 간단한 저녁 식사와 함께 영화를 시작하는 순간은 잊기 힘들 것입니다. 식욕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도입부에서 차례로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벌이는 일들은 영화 도입부는 막 사온 김말이와 오징어 튀김과 그리 어울리지 않았습니다(분명히 영화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 그걸 사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shortbus같으니....). 이러기 때문에 저녁을 편안하게 먹기 위해 다른 영화를 대신 보았고, 며칠 후인 이번 주 화요일 밤에 콘치즈와 귤과 함께 [숏버스]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도입부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여러 성행위들을 솔직하게 묘사했지만, 그런 다음 영화는 이런 대담함에 걸맞게 진지하게 얘기할 뿐더러 동시에 여러 훈훈하거나 재미있는 장면들을 제공합니다.



CG로 만들어낸 아기자기한 뉴욕 도심 모형을 이리저리 훑어가면서 영화는 주인공들을 소개합니다. 커플 상담가인 소피아의 경우 남편 롭과 겉보기엔 건강한 성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최근에 맡은 커플 얘기하는 것을 보면 둘에겐 문제가 없는 듯하지만 정작 소피아는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소피아가 상담을 맡은 게이 커플 제이미와 제임스는(최근까진 제이미와 제이미였습니다)는 자신들 관계에 제3자를 끌어들이기로 합니다. 둘에게 상담을 하다가 숏버스라는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섹스 클럽에 대해 알게 된 소피아는 한 번 그곳으로 가보기로 합니다. 거기서 그녀는, 버릇없는 부잣집 도련님 같은 고객이 귀찮게 따라다는 dominatrix 전문인 세브린느와 만나게 됩니다. 숏버스에서는 온갖 행위들이 있고 온갖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엔 제이미와 제임스 사이에 끼게 된 세스도 있고, 제임스를 건너 건물에서 오래 전부터 훔쳐 봐온 칼렙도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숏버스]에서의 섹스 묘사는 근래 본 영화들 중에서 가장 강도가 높습니다. 특히 제 저녁 식사를 방해했던 도입부에서부터 영화는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처음부터는 오줌 누는 것을 아예 대놓고 보여준 다음엔 같은 주인공이 말하기 민망한 셀프 서비스를 시도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에 이어 [색, 계]보다 더 대놓고 들이대미는 남녀 성관계 장면이 이어지기도 하는데, 단순히 둔부가 들썩이는 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니 사전 정보 없이 보신 분들은 혼비백산할 것입니다. 한편, 월드 트레이드 센터 자리가 내려다보이는 방에서 세브린느(그녀의 본명은 바로....)가 채찍 휘두르면서 손님 접대하는 장면은 이에 비하면 귀엽지만, 절정에 도달하는 순간은 저 세상에 계신 잭슨 폴락 선생께서 열 받거나 혹은 독창적 기법이라면서 감탄하실 것입니다.



이 정도만 되면 도무지 가까이 할 수 없는 영화 같지만, 가면 갈수록 영화는 다정하고 주인공들을 끌어 안아줍니다. 별별 사람들이 모이는 섹스 클럽 숏버스는 음험한 타락의 공간이 아닙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마다 여기저기 있는 방에는 별별 사람들과 행위들이 있어서 눈이 휘둥그래지긴 합니다만, 숏버스는 좋은 음악이 늘 있는 편안한 장소이고, 클럽 주인인 저스틴은 친절한 사람입니다. 어느 방에는 레즈비언 숙녀분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조용한 공간이 있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나쁘게 보이지 않는 그룹 섹스가 한창 벌어지기도 하고, 또 한 구석에서는 유쾌한 저질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이 공간을 무대로 주인공들이 통하거나 해결책을 찾는 과정은 선정적으로 다루어지기보다는 진지하고 유머스럽게 다루어지고 있으니 섹스는 어느 새 자연스러운 하나의 보조도구가 됩니다. 전직 뉴욕 시장이라는 할아버지가 세스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왠지 모르게 찡한 면이 있고, 소피아가 남편의 부주의로 겪게 되는 코메디나 쓰리섬하는 도중 어디에 대고 노래를 부르는 광경은 정말 웃깁니다.



존 카메론 미첼 감독이 오디션을 통해 뽑은 배우들은 정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몸을 사리지 않았지만, 감독과의 피드백을 통해 나온 각본을 통해 자신들이 맡은 캐릭터들의 문제와 고민들을 잘 전달해서 영화를 포르노그래피와 구분되도록 만듭니다. 존 카메론 미첼은 영화의 외관을 근사하게 만듭니다. 슈퍼 8mm 필름을 사용한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가끔씩 보여주는 클럽의 모습도 훌륭하지만, 여기에 깔린 노래들도 훌륭합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이곳저곳을 둘러다보는 도구로 사용하는 아기자기한 뉴욕 도시 모형이고 이것은 정말 근사할 볼거리입니다. 단순히 장식품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마지막에 감독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근사하고 밝게 전달하거든요.



[숏버스]를 처음 볼 때 거부감이 드실지도 모릅니다. 그 때문에 영화를 보는 동안 서서히 끌려가던 저도 주위사람들에게 추천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섹스만 빼면 자신의 고민을 얘기하는 뉴요커들의 재치있는 이야기이고, 그것은 감독의 말대로 우디 앨런 영화들과 그리 많이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화는, 독특하고 재미있고 훈훈했다는 인상을 남깁니다. 제가 자주 방문하는 DVD verdict의 요약 평이 "It's everything you need to get through the next two years of George Bush."였는데, 우리 동네도 이 영화가 정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유료 다운로드로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지요.
Posted by 나에게오라
2년간 심의 스캔들을 겪고 마침내 개봉하는 <숏버스>
<숏버스>는 이상한 정치영화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영화는 섹슈얼리티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감독의 능청일 뿐이다.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건 '해방'이다. 모든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개인. 아니 궁극적으로 그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절대평등의 상태. 이보다 더한 유토피아가 어디에 있는가?

<숏버스>는 의도적으로 섹슈얼리티를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세계무역센터가 서 있던 그라운드제로를 창문 너머로 보여주는 것이나, 60년대를 연상시키는 반문화운동의 용사들을 등장시키는 것이나, 커밍아웃하지 않은 전직 뉴욕 시장의 입으로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는 넋두리를 들려주는 장면에서 영화는 단순한 '포르노그래피'로 만족할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 영화를 보고 '야하다'는 표현을 쓰는 건 그래서 좀 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야하다기보다 섹슈얼리티의 실체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쉽게도 극장 개봉용 판본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지만, 이 영화를 '야한 영화'에서 구원하는 건 역설적으로 성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그 사실성에 있다.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을 보고 야하다고 생각하는 게 좀 이상한 것처럼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야한 게 아니고 불쾌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 숏버스

<숏버스>는 젠더나 페미니즘처럼 이론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냥 소재로 사용하고 있을 뿐, 주로 그려내는 건 이성애와 동성애이고, 궁극적으로 이 둘이 만나는 지점으로 오르가즘을 설정해놓았다. 이 영화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오르가즘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보여주려는 건 뉴욕의 '자유주의.' 여기에서 자유주의는 '리버럴리즘'이라고 표현해야 적절하게 뉘앙스를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해방되어서 자유로운 개인들을 지칭한다. 이게 바로 뉴요커의 자부심이다.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뉴욕의 포용주의에 대한 긍지를 빼놓는다면 뉴욕은 시체들의 도시일 뿐이다.

<숏버스>는 겉으로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60년대여 다시 한 번'을 외친다. "60년대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뉴욕은 여전히 그때와 다를 게 없다는 주장이 영화에 깔려 있다. 9.11테러가 가져다준 뉴욕의 파괴는 자유와 해방의 선봉에 서 있다고 믿었던 뉴요커의 이상에 대한 파산선고이기도 했다. <매트릭스>의 음울한 선언처럼, 뉴욕은 '실재의 사막'으로 화해버렸다. <숏버스>는 이렇게 심각하게 상처받은 뉴요커의 자존심에 대한 치유제이다. 루시디가 <분노>라는 소설에서 묘사한 그 뉴욕에 대한 하나의 처방책이 <숏버스>인 셈이다.

따라서 이 영화를 미국 판 '386세대 영화'로 보는 것도 크게 틀리지 않은 판단이다. 그러나 법과 정의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한국영화의 경우와 달리, 이 영화는 개인의 욕망을 통해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대명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준다.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지점은 여기이다. 한국에서 <숏버스>를 보고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자유주의의 희망을 발견할 이들이 누구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보는 순간 이 아이러니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다. 뉴욕의 자유주의를 역사의 희망으로 간직한 이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한국의 중간계급일 테니 말이다. 익숙한 분법으로 본다면 <숏버스>의 주요 관객은 백영옥의 소설 <스타일>에 등장하는 '강남좌파'일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

▲ 숏버스

심의문제를 둘러싼 소송에서 <숏버스>를 '위험하지 않다'고 한국의 사법부가 판정할 수 있었다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가 섹슈얼리티를 노골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그 자체에서 이 영화의 급진성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 영화의 관점은 페미니즘적이지도 않고 젠더이론적이지도 않다. 억압의 가설에 충실히 따라가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전적 관점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오르가즘의 신화에 대해 설파하는 대사도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오르가즘을 신화라고 규정하는 게 아니라 여성의 질 오르가즘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남성 성기의 삽입만이 여성을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든다는 그 판타지를 공격하는 게 비판의 핵심이다.

게다가 <숏버스>가 보여주는 낙관주의는 섹슈얼리티의 범주만을 강조함으로써 엄연히 현실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계급이나 인종 문제를 덮어버린다는 측면에서 정체성 정치학의 한계를 고스란히 답습한다. 사회적 소수자로서 동성애자들이 권익을 되찾는 건 중요하지만, 백인 동성애자와 흑인 이성애자, 또는 백인 중간계급 동성애자와 이민자 이성애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관계를 해명하지 못한다. 섹슈얼리티의 해방이 궁극적인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60년대적 난관은 뉴요커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적절한 명약일 수 있겠지만, 새롭게 변화한 정세에서 뉴욕 문화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성찰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남성 성기가 이만큼 적나라하게 자주 화면에 비치는 경우가 없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획기적인 영화이지만, 한국에서는 이마저도 '모자이크'에 거세당해 버렸다.

글쓴이 이택광은 현재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영국 워릭대학에서 철학 석사와 셰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문화이론 및 문화연구를 전공했다.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 『민족, 한국 문화의 숭고 대상』 『세계를 뒤흔든 미래주의 선언』 등의 책을 썼으며 최근 『뉴 레프트 리뷰』 번역 및 편집에 참여했다. 이 글을 시작으로 프레시안에 '이택광의 영화읽기'를 연재하며 본격적인 영화평론가로 활동할 예정이다.

/이택광 문화평론가 경희대교수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Posted by 나에게오라

 
▲ 영화 숏버스

[이데일리 SPN 장서윤기자] 영화 '숏버스(감독 존 카메론 미첼 수입 스폰지)'가 2년여의 법정 공방을 딛고 오는 12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숏버스'는 한번도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없는 성 상담가가 한 비밀모임에 참여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성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

성에 대한 갖가지 취향과 시각을 통해 소통과 치유라는 주제를 그린 이 작품은 2006년 칸 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한국에서는 혼음장면 등이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제한상영등급 판정을 받아 사실상 개봉하지 못한 채 표류해왔다.

그러다 지난 1월 오랜 소송 끝에 제한상영가 등급분류는 위법이라는 법원의 결정을 이끌어내면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으로 관객들과 만나게 됐다.

이번 한국 개봉판의 경우 오리지널 버전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연출자 존 카메론 미첼 감독이 아시아권 국가의 심의 통과를 위해 직접 성기노출 부분에 모자이크 처리를 해 특별제작한 '아시아 버전'인 것이다.

▲ 영화 숏버스
영화에서는 정작 자신은 단 한번도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없는 성 상담가, 게이인 노년의 전직 뉴욕시장, 연애에 항상 실패하는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 등 다양한 이들이 '숏버스'라는 언더그라운드 살롱에 모여 각자의 성적 고민을 솔직한 대화와 섹스를 통해 풀어놓는다.
 
이에 따라 가학·피학적 성행위, 레즈비언 섹스, 스리썸(threesome) 등 거의 모든 형태의 성행위가 화면 속에 펼쳐진다. 

작품 속 성행위 장면은 모두 실제다.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배우들은 촬영장에서 감독과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때로는 즉흥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때문에 전체적인 영화 맥락을 놓고 볼 때는 일부분의 모자이크 처리가 작품 흐름을 방해하거나 크게 거슬리지는 않는다.

'숏버스'의 수입사 스폰지의 조성규 대표 또한 "감독 스스로 이 작품은 노출이나 파격적인 정사 신보다는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와 흐름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며 "감독이 최대한 연출 의도는 살리는 방향으로 모자이크 처리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야기 구조보다는 파격적인 표현과 독특한 감수성으로 대중과 소통을 시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볼 때는 아쉬운 점도 다분히 있다.

▲ 영화 숏버스
특히 관객들에게 화두를 던지는 영화 도입부는 가장 그렇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괴로워하는 게이 남성이 욕조에서 자신의 성기를 관찰하다 마치 요가를 하듯 몸을 말아 다리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 자세로 자위행위를 한 후 자신의 입 안에 사정하는 장면은 작품의 가장 파격적인 신으로 꼽힌다. 그러나 남녀 성기를 모자이크 한 한국 개봉판에서는 이같은 장면은 사실감있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또, 세 명의 남성이 섹스를 하다 서로의 항문에 대고 미국 국가를 부르는 장면도 오리지널 버전에서는 애절한 자유로움이 극대화되지만 모자이크 처리 버전은 영화 속 감성이 반감되기도 한다.

어찌됐든 2년여의 지리한 공방 끝에 관객들을 만나게 된 '숏버스'는 개봉 자체만으로도 현행 심의제도에 대한 여러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나온 '숏버스'가 그간의 논란만큼이나 높아진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Posted by 나에게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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